며칠 전에 허교수와 함께 동대문 시장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청계천6가에 즐비한 헌 책방가를 지나면서
옛날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책을 살 돈이 넉넉질 않아 헌 책방을 이잡듯이 뒤지면서 책을 찾아야 했다.
원하는 것을 찾으면 책방 주인과 싸우다시피 매달려 값을 깎고 돈이 모자라면 계약금만 주고는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기다려 달라 하고 겨우 돈을 준비하여 며칠 후에 와 보면
어느 집이 어느 집인지 비슷비슷하여 실수하기 일쑤요 진땀을 빼고서야 한참만에 찾았던 옛추억들이 떠올랐다.
허교수도 책방을 돌며 책을 구하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옛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고 걸었다.
그러다가 붕어빵을 굽는 리어커 앞에 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붕어빵을 보니
옛 고향 친구들을 만난듯이 반가워짐을 느꼈다.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느라 골목길에서나 볼 수 있는
옛 풍경을 가까이에서는 접하지 못하였다가 걸으면서 그것을 보니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요?" 하니 천원에 네 개라 했다.
그러자 허교수가 "그럼 이천 원어치만 주시오"하고 돈을 꺼냈다. 그래서 담아 주는 대로 나는 봉지를 들고 다시 걸었다. 그러자 허교수가 "내가 들지요" 하길래 그만 두라고 손을 빼듯 피하고는 그 봉지를 들고 주차장까지 걸었다. "총장님, 옛날 생각이 나시는 모양이지요"하고 말하는 허교수를 쳐다 보니 나보다 한 이십은 젊은데 그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겠지만 내게는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붕어빵 생각이 종종 나지만 누가 사주는 사람도 없고 또 내가 일부러 나와서 살 수도 없으니 참으로 오랫만에 붕어빵을 먹어보게 됐다고 했다.
내가 시무하는 교회의 신도가 수만명이요 또 대학원 대학교의 총장으로서 제자들이 여기저기 깔려있는데 총장이 길에 서서 겨우 풀빵이나 사먹고 있는 줄을 혹이라도 보면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 자유함이 있는 작자에게 매우 유익하고 소중하리라 본다.
나는 고학할 때 풀빵 신세를 진 적이 많다. 보름 동안을 하루에 풀빵 하나나 풀빵 두개씩만을 먹고 견딜 때도 있었다. 창자가 등에 붙어버린 것처럼 배는 힘이 없고 쪼르륵 소리로 곁에 있는 자들의 고개를 돌리게 하곤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풀빵 하나가 들어가면 그렇게 기분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나서는 물을 많이 마셨다. 그것이 하루 창자를 달래주는 방법이었다.
하도 가난한 때 배를 달래 준 탓이어서 그런지 풀빵이 입에 맞고 늘 먹고 싶었다. 5.16 군사혁명이 나고 나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취직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없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평편 족이어서 신체 검사에서 1을종 판정을 받고도 영장이 나와 논산 훈련소 신검대까지 갔었지만 거기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귀향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불합격 귀향 조치를 당한 사람이어서 군 미필자는 노동판에서도 거부할 때인지라 어디서 밥 한끼 얻어 먹기가 힘든 처지였다. 이렇게 일년간을 견디었으나 더 이상 버틸 힘도 없고 좌절감과 무력감 뿐이었다. 그러면서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죽음이었다. 이렇게 무력해진 사람을 누가 반겨줄 리도 없고 내가 일하고자 해도 일자리를 내주는 자가 없으니 세상을 하직하는 것만이 상책인 것같이 여겨졌다.
그러므로 준비해 두었던 키니네가 담긴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고향으로 향했다. 내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불효 자식이 아버지께 사죄하고 그 곁에서 죽어 잠들어 버려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주머니 속에는 돈이 한 푼도 없고 하루를 온전히 굶은 상태였으니 기운도 없었다. 역무원의 눈을 피해 간신히 천안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무임 승차했다.
검표하는 차장에게 걸릴까 봐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여 가면서 홍성역에 간신히 내렸다. 홍성역에서도 역무원의 눈을 피해 빠져 나가려고 고심을 하다가 겨우 빠져 나왔다. 거기서부터는 힘을 다해 십리만 걸으면 아버지 산소가 있었다.
멀리 월산이 바라보이는데 겨울이라서 먹은 것도 없는 뱃속이 창자를 긁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역을 뒤로하고 걷다가 다시 역쪽으로 돌아와 홍성역 공중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어찌나 지저분한지 금방 죽을 결심을 한 나라도 숨을 쉬기조차 거북할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배의 통증은 가라앉고 편안했다. 지저분한 화장실 안의 벽에는 별별 낙서가 다 그려져있는데 그 중에 눈에 띄는 낙서가 있었다. "임마 죽긴 왜 죽어". 누군가 거기 앉아 일을 보면서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고 자신을 격려했던 낙서 같았다.
그 낙서는 나와 상관이 없는 글이라고 고개가 내려가는 대로 시선이 따라가다 말고 한 곳에 멈추었다. 색깔이 불그스럼한 종이 하나가 구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지폐 같았다. 흥미로워 그것을 펴보니 급한 사람이 준비하지 않고 들어왔다가 급한 나머지 휴지 대신 사용하고 버린 십원짜리 지폐였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돈인지라 거기서 나올 때에 그것을 움켜쥐고 나왔다.
그리고 역 앞에 설치된 수도에 가서 물로 그것을 깨끗이 빨았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월산을 바라보며 다시 걸었다.손바닥에는 물이 젖은 십원짜리 지폐가 손바닥에서 나온 체온 때문에 물기가 말라가고 있었다. 몇백 미터쯤 걸었을 때에 마침 풀빵을 굽는 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가서 그 돈을 주고 빵 세개를 샀다.
두 개는 그 자리에서 먹고 하나는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오다가 월산 푸쟁이에 올라와 거기 앉아서 마저 먹었다.
그토록 기운을 차릴 수가 없더니만 풀빵 세 개가 들어가고 나니 힘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 낙서가 생각이 났다. "임마 죽긴 왜 죽어". 그래서 나는 혼자 웃었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는 몇년 전에 아버지만이 마을 산소에 남겨둔체 어머니와 두 동생을 데리고 낯선 예산으로 이사가다가 잔디 위에 앉아 온 식구가 한바탕 울던 자리다. 그때에 어머니는 흘러나오는 콧물을 손으로 훔쳐내듯이 푸시고는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메치시면서 우시던 그 자리다. 그때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산 목숨이 못 살아 가겠어유. 이제 그만 내려가유"하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내가 지금은 패배자가 되어 죽으려고 오는 길이 아닌가? 나는 순간에 모든 생각을 고쳐먹고 붕어빵이 들어간 뱃심으로 살푸쟁이를 뛰어 내려온 일이 있다.